머리회전과 눈치가 빠르면 영민하다고 한다. 재치와 독창성을 겸비한 사람은 총명하다고 한다. ‘천재’ 혹은 ‘영재’에 가까운 사람들은 집중력이 남다르다. 기억력이 좋은 이유는 단순한 외우고 ‘되새김질’을 잘하는 게 아니다. 단기 집중력이 대단히 우수하고, 기 보유 지식과 새로운 지식의 연관과 추론을 통해 영역의 확대를 쉽게 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지,덕,체의 삼위 일체를 지향하는 교육(?)을 수없이 강요받아 왔지만, 가르치는 사람조차 그런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으므로, 제대로 가르치기는 어려우리라~!!
몰입교육과 남들 따라하기 덕에 요새 어린 아이들은 운동이면 운동, 음악이면 음악, 영어면 영어 등 다들 하니까 대충 적당히 하는데는 익숙하다. 각기 다른 역량을 키워줄만한 개성있는 커리큘럼의 부재와 더불어, 대안없는 부모의 치맛바람도 일조하리라~!! (치맛바람도 일부 긍정적 효과가 있긴 하다)
우리는 책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국어 시간에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글문장은 어떻게 끊어 읽어야 하는지는 누구도 자세히 알려준 적이 없다. 그저 어떤 문단이 나오면 박지원의 일기라고 빨리 알아야 하고, 호는 연암이고 글의 시대적 배경은 어떻고, 글쓴이의 근원적 사상을 묻는 주제까지 단숨에 파악해 내어야 한다. 여기서 국어인지 암기과목인지 애매해진다. 내가 국어를 지겹도록 싫어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Logical Reasoning 능력 없이 비판을 아닌 비평을 제대로 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꼬투리를 붙잡는 시비조의 대화가 아닌, 논리의 가설을 비판하고 반례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제대로 된 토론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시비조 일색이거나 인신공격성이 대부분이었다. 공적은 공적대로 평가를 하고, 사적인 일은 또 사적으로 평가를 해야 할 텐데, 우리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의 자질면에서 후진적 수준에 놓여 있다.
우리 생각에는 가깝고 비슷한 나라라고 쉽게 비교하려하는 일본은 이미 우리랑 차원이 다른 곳에 가 있다. 과거 수십년 동안 우리는 단지 일본의 교육을 모방하고 입시제도를 가져와서 일본의 흉내를 내었던 것 같다. 요새는 미국의 것도 가져다가 흉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육은 지속적인 입시제도 개선(개악인지 개선인지)만 하고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개선이 없다. 입시제도 변경 역시 교육의 근원적 문제와 이슈를 파악하지 못하고, 선진 제도만 따라하려다 보니 금방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교육은 ‘백년지대계’라더니, 교육부장관은 동네 반상회장보다 자주 바뀐다.
아직 우리 나라 교육은 보통아이를 영민한 아이, 총명한 아이로 그리고 지식을 지혜로 발현하게 하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기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정리되지 못하면 우리는 수십년이 지나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지 못하고, 낮은 국민의식과 선진국이 되지 못한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백년 동안 선진국에 들어선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아르헨티나, 체코 등 수없는 나라가 문턱에서 넘어가지 못했다. 난 우리민족이 그 문턱을 넘어설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교실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국민의 독서력 증진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제도적으로는 논리학, 말하기와 같은 국어 과목의 상세화 및 교육 등이 어릴적부터 체계적으로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초등교사 역시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해서 교양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면 Broken 영어로도 미국인들을 이길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 실력 때문에 미국인과 토론을 어렵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부족한 독서량, 경험의 부재로 인한 낮은 topic 커버리지, 논리의 흐름을 파악하여 대응할 Reasoning 및 커뮤니케이션의 능력 부족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럴려면 학교에서도 영어 교과서 대신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같은 명서를 가르켜야 한다. 그리고 읽기, 듣기의 수동적 부분뿐 아니라 말하기, 작문같은 능동적 언어 영역도 가르켜야 한다. (교사의 자질론은 여기서 등장하겠지)
언젠가 나도 일선에서 은퇴를 하게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 남은 평생을 교육에 바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