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다시 꽂힌 패닉의 곡.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세월호 피해의 가족을 Remind 시키며 출근하는 나를 울컥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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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다시 꽂힌 패닉의 곡.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세월호 피해의 가족을 Remind 시키며 출근하는 나를 울컥하게 함
미워하지 말자
미워한다고 바뀔거라면 수없이 미워했을테니
원망하지 말자
그도 당신을 원망하고 있을테니
기대하지 말자
기대한만큼 실망이 더 클테니
사랑하지 말자
깊이 사랑한 만큼 아픔은 더 깊을테니
1. 졸음에 겨운 아침 또는 새벽인가….
시계가 없는 내 방은 낮과 밤만 존재한다
“에볼루션”이 모야?아침부터 꼬맹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혁명이야” 엄마는 간단히 답했다.
엄마는 말해놓고 스마트폰으로 다시 찾아본 뒤 재차 꼬맹이에게 알려준다
“엉 혁명이 아니고 진화야”
“어 근데~ 진화가 모야?”
“그게 …” (그 뒤에 대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2. 또봇이라는 자동차로봇과 그 만화 시리즈가 남자 유아에게 Hot item이다.
일본에서 온 파워레인저도 보이지도 않는 마트 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Evolution이라는 그 시리즈의 종류이름인데, 그 단어는 그렇게 로봇이름에 갖다 붙일만큼 흔하고 만만한 단어는 아니다. 또봇 만화에는 기타 트랜스포메이션, 인티그레이션이란 단어도 자주 나온다. (영실업에서 컨설턴트가 작명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엄마들이 영어 사전 찾을 일이 그만큼 많아 진 것이다.
엄마, 아빠가 그만큼 똑똑해져야 애들도 똑똑해 지는 시대다.
3. 기업은 항상 변화를 요구한다.
기존 사업에 cash cow가 있더라도, 더 큰 cash를 만들 수 있는 한 방(?)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기업가는 변화를 Leading해야 하는데 이 경우 가장 큰 고민은 변화가 evolution 과 revolution 이냐인데 이런 문제를 컨설팅과 현업에서 몇 번 겪다 보니 왜 항상 어느 정도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가 계속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조금씩 이해가 간다.
아마 3년 정도 후에 내 스스로가 이 명제에 대한 clear thought을 정리해서 얘기 할 수준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과제는 시간이 답이다)
4. 리트로낙스 (Lythronax argestes)
최근 유타에서 발견된 신종육식공룡이름이다.
수백개나 되는 공룡이름을 거의 다 알고 있는 꼬맹이에게 새로운 공룡은 더할나위 없는 좋은 공부거리다.
꼬맹이에게 새로운 공룡과 그림을 보여주니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한마디 한다.
“어 이거 티라노네.. 아니 조금 다르게 생겼다”
“어 9m야”
“티라노보다 작네. 티라노는 13m인데”
한참 쳐다보던 꼬맹이는 먼가 깨달았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엄마..엄마.. 새로 공룡이 발견되었다.이름이 몬지 알아? 리트로낙스야” 한번 불러준 이름을 그냥 아는 친구 이름처럼 불러댄다.
5. 악어와 공룡
3년전인가 단어만 몇개씩 말하던 꼬맹이가 겨우 말문이 좀 트여 문장처럼 말하기 시작할때였다.
63수족관인가 암튼 거기서 악어를 본 뒤
“아빠 저거 공룡이에여?”
“아니 악어야”
“아 악어 그럼 저건 작은 공룡이에여?? 공룡은 다 죽었자나여?”
“어 그게… 나중에 집에 가서 알려줄게”
“엉 엄마한테 물어보자”
“…”
나중에 안 사실은 정확히는 공룡시대에도 악어는 살았었다. 단 공룡은 다 멸망했고 악어 일부 종만 겨우 살아남았고 아직도 살고 있다. 공룡은 거의 다 죽고 덩치가 공룡만큼 큰 거대 악어도 다 죽었다.
간단정리하면 공룡 –> 악어로의 진화는 Maybe 다. 덩치 큰 종은 빨리 멸망한다
6. 오래가는 기업
한 템포 쉬어 다시 기업으로 돌아가 보자.
기업도 결국은 Slender한 형태가 살아남기에 더 유리한 거 같다. 머리(뇌)부터 다리까지가 길어지면 질수록 경쟁과 외부 환경 변화에 대응이 어려워진다.
변화가 어려워 진다는 것은 다시 돌려 말하면 내부적 Revolution 이 불가능한 형태가 됨을 뜻한다.
7. 항생제와 바이러스
바이러스는 항생제에 죽지만 살아남은 녀석은 다시 더 강해진다.
내성이 생긴 것이다.
대기업이 경쟁력을 지속적 영속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은 다운사이징보다는 결국 기업문화의 강화가 핵심일텐데, 할 수만 있다면 기업은 내성을 기르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외부 인력 채용보다는 내성이 더욱 강한 구성원을 지속적으로 육성/확보하고 그 구성원 에게 미래를 맡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가끔 경쟁력 있는 외부 인력채용으로 감기 백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머리회전과 눈치가 빠르면 영민하다고 한다. 재치와 독창성을 겸비한 사람은 총명하다고 한다. ‘천재’ 혹은 ‘영재’에 가까운 사람들은 집중력이 남다르다. 기억력이 좋은 이유는 단순한 외우고 ‘되새김질’을 잘하는 게 아니다. 단기 집중력이 대단히 우수하고, 기 보유 지식과 새로운 지식의 연관과 추론을 통해 영역의 확대를 쉽게 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지,덕,체의 삼위 일체를 지향하는 교육(?)을 수없이 강요받아 왔지만, 가르치는 사람조차 그런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으므로, 제대로 가르치기는 어려우리라~!!
몰입교육과 남들 따라하기 덕에 요새 어린 아이들은 운동이면 운동, 음악이면 음악, 영어면 영어 등 다들 하니까 대충 적당히 하는데는 익숙하다. 각기 다른 역량을 키워줄만한 개성있는 커리큘럼의 부재와 더불어, 대안없는 부모의 치맛바람도 일조하리라~!! (치맛바람도 일부 긍정적 효과가 있긴 하다)
우리는 책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국어 시간에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글문장은 어떻게 끊어 읽어야 하는지는 누구도 자세히 알려준 적이 없다. 그저 어떤 문단이 나오면 박지원의 일기라고 빨리 알아야 하고, 호는 연암이고 글의 시대적 배경은 어떻고, 글쓴이의 근원적 사상을 묻는 주제까지 단숨에 파악해 내어야 한다. 여기서 국어인지 암기과목인지 애매해진다. 내가 국어를 지겹도록 싫어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Logical Reasoning 능력 없이 비판을 아닌 비평을 제대로 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꼬투리를 붙잡는 시비조의 대화가 아닌, 논리의 가설을 비판하고 반례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제대로 된 토론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시비조 일색이거나 인신공격성이 대부분이었다. 공적은 공적대로 평가를 하고, 사적인 일은 또 사적으로 평가를 해야 할 텐데, 우리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의 자질면에서 후진적 수준에 놓여 있다.
우리 생각에는 가깝고 비슷한 나라라고 쉽게 비교하려하는 일본은 이미 우리랑 차원이 다른 곳에 가 있다. 과거 수십년 동안 우리는 단지 일본의 교육을 모방하고 입시제도를 가져와서 일본의 흉내를 내었던 것 같다. 요새는 미국의 것도 가져다가 흉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육은 지속적인 입시제도 개선(개악인지 개선인지)만 하고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개선이 없다. 입시제도 변경 역시 교육의 근원적 문제와 이슈를 파악하지 못하고, 선진 제도만 따라하려다 보니 금방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교육은 ‘백년지대계’라더니, 교육부장관은 동네 반상회장보다 자주 바뀐다.
아직 우리 나라 교육은 보통아이를 영민한 아이, 총명한 아이로 그리고 지식을 지혜로 발현하게 하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기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정리되지 못하면 우리는 수십년이 지나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지 못하고, 낮은 국민의식과 선진국이 되지 못한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백년 동안 선진국에 들어선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아르헨티나, 체코 등 수없는 나라가 문턱에서 넘어가지 못했다. 난 우리민족이 그 문턱을 넘어설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교실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국민의 독서력 증진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제도적으로는 논리학, 말하기와 같은 국어 과목의 상세화 및 교육 등이 어릴적부터 체계적으로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초등교사 역시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해서 교양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면 Broken 영어로도 미국인들을 이길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 실력 때문에 미국인과 토론을 어렵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부족한 독서량, 경험의 부재로 인한 낮은 topic 커버리지, 논리의 흐름을 파악하여 대응할 Reasoning 및 커뮤니케이션의 능력 부족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럴려면 학교에서도 영어 교과서 대신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같은 명서를 가르켜야 한다. 그리고 읽기, 듣기의 수동적 부분뿐 아니라 말하기, 작문같은 능동적 언어 영역도 가르켜야 한다. (교사의 자질론은 여기서 등장하겠지)
언젠가 나도 일선에서 은퇴를 하게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 남은 평생을 교육에 바칠 것이다.
예전에 연애할때 죽으라 좋아하던 친구가 여자랑 헤어질때는 많은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다른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또 죽을정도로 좋아했고 헤어지면서 또 죽느니 사느니 했다. 그렇지만, 또 다른여자를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러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산다.
근원적으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연애 상대가 바뀌더라도 연애의 방식에 있어서는 큰 틀에서 바뀌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근원적으로 좋아하는 포인트는 동일할 것이다. 균형미 넘치는 섹시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이제동을 만나 사귈 일은 파란하늘에 벼락맞는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사람을 바꾸려는 시도는 불합리한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도 서로에게 ‘맞는’ 상대를 찾는 것이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바꿀 수 없다. 자식이 부모를 바꿀 수 있을까?
결국은 스타일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일하는 스타일, 말하는 스타일도 나이가 들면 고착되며 실제 조사를 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 시기는 20대 초중반에 모두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왕따’같은 대우를 받던 친구가 대학 다닐때는 각종 모임을 주최하고 수십만의 온라인 까페 회장이 되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20대를 넘어가면 그렇게 자신을 변모시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내 자신을 바꾸는 ‘계기’라는 것을 자주 돌아다 본다. 경험적으로 그 ‘계기’는 당시 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의 ‘상실’ 이나 그 상실감으로 오는 ‘후회’ 같은 부분이 많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런 성장통을 통해 나 자신이 많이 발전됐다고 스스로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만난 10년 지기 대학후배 2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에게 듣는 말은 항상 같았다.
‘똑같네’
결국 난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과거부터 일관된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